몽골 제국 시절 벌어진 끔찍한 잔학행위에 대한 당대 문명 세계 각지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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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png 몽골 제국 시절 벌어진 끔찍한 잔학행위에 대한 당대 문명 세계 각지의 기록들

몽골 제국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죽였나, 얼마나 학살하였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몇십, 몇백만, 몇천만 애초에 통계를 낼 수도 없을 뿐더러

온갖 과장 및 짬뽕이 되어버려서 실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당대 몽골제국에 의해서 고통 받던 쪽의 입장에서 숫자들을 부풀리는 차원에서 한 기록도 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유목민족이나 몽골에 우호적인 사가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부분에서 과장이 심하다고 지적하기도 하다.

다만 실제로 죽인 사람들 숫자가 얼마나 되던간에,

그 과정에서 극도로 잔학한 짓이 많이 자행되었던것 자체는 분명한데,

아랍에서부터 중국, 고려, 일본 등등 각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기록이 많고

심지어 일부는 몽골제국 본인들이나 그 후예들 쪽에서 자랑스럽게 기록에 남긴것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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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앗딘의 <집사>는 일한국의 재상 라시드 앗딘이 쓴 기록으로,

일한국은 몽골 제국 사한국(四汗國) 중 하나로 즉 몽골 제국 본인들의 입장에서 쓴 기록들이다.

즉 적대적인 세력의 사가들이 쓴 이야기가 아니라는것.

그런데 본인들의 입장에서 썼다는 기록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수크낙 전투 中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자 용서와 관용의 문은 닫힌 채 분노와 폭력이 분출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임으로써 복수했다.

우즈켄드+바르칠릭켄트(바르치칸/바르진)+아시나스 전투 中

군대의 대부분은 불량배와 건달들이었다. 전투에서 온 힘을 다했지만 거의 모두가 죽었다.







이렇게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거의 모두 죽였다.” 는 기록은 아주 흔한 기록이다.

부하라 전투 中

양측이 투석기들을 배치했고, 활에는 시위를 메겼다. 돌과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안에서는 나프타 병들을 쏘아댔다.

(중략)

성채의 해자는 생물, 무생물들로 땅과 같이 평평해졌고, 부하라 징용대[의 시체]로 말미암아 높아졌다.

(중략)

캉클리인들 가운데 채찍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3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포로로 끌려 갔다.

반항자들이 시내에서 일소되어 성벽을 [부수어] 지표면과 같이 만들고, 도시민 모두를 벌판의 기도장으로 내몰아

젊은이들을 징용대로 [선발해] 사마르칸트와 다부시야로 끌고 갔다.

부하라처럼 사람들은 모조리 다 죽고

도시 전체가 아예 가루처럼 평평해진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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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란의 니샤푸르는 천년전 무렵에는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곳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휩쓸고 난 이후 모든것이 파괴되었다.

발흐 전투 中

그곳 수령들은 여러 가지 양식과 선물을 갖고 그에게로 와서 귀순과 복속 의사를 표시했다.

그뒤 [사람의] 수를 세야 한다는 명목으로 발흐의 주민들을 모두 한꺼번에 벌판으로 데리고 나왔다.

익숙한 관습대로 그들을 병사들에게 분배한 뒤 모두 다 죽여 버렸다.

도시의 성벽과 보루를 파괴하고, 가옥과 동리들에 불을 질러 모두 폐허로 만들었다.

몽골은 중간중간 속임수를 쓰기도 했는데,

발흐 전투에서는 그곳의 수령들이 선물을 바치며 항복하자 

“인원을 파악해야 한다” 는 핑계로 주민들을 성 밖으로 유인한뒤,

갑자기 돌변하여 대다수를 학살하고 나머지를 병사들에게 노예로 분배하고

도시는 약탈한뒤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적대적인 세력의 악의적인 기록이 아니라 몽골제국 측에서 쓴 <집사> 에 나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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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칸 성채 전투 中

무에투켄-칭기스 칸이 가장 사랑하는 손자였고, 차카타이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었다-이 석노의 화살에 맞아 

그 상처 때문에 사망했다. 이런 이유로 칭기스 칸은 그곳 정복을 서두르라고 했고,

그곳이 함락되자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여하한 인간이든 어떤 종류의 가축, 짐승, 조류든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고,

포로나 전리품은 하나도 취하지 말며, [그곳을] 사막으로 만들어 이후로는 건물을 짓지 말고 

어떤 인간도 그곳에 살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몽골은 필요에 의한 약탈이 아니라 

순전히 학살을 위한 학살, 계획적인 학살도 심심찮게 하곤 했는데,

칭기즈칸이 아끼던 지인이 죽자

포로조차도 잡지 않고 단 사람도 남기지 않고 

남자건 여자건 노인이건 아이건 심지어 가축 한 마리까지

모든것을 죽이고 폐허로 만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이 역시 <집사> 에 나오는 기록이다.

제베와 수부타이의 이라크 지역 점령전 中

-(하르+심난+라이 시+쿰) 그곳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어린아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잔잔으로 가 다른 도시들의 두배(나 되는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 지방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

이라크 지방과 속령의 대부분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 쪽으로 향했고, 도중에 가는 곳마다 똑같은 방식에 따라 살육과 약탈을 했다.

-(마라게) 몽골인들은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무슬림 포로들을 앞장세웠고, 돌아서는 사람은 누구나 죽여 버렸다. 

 며칠간 이런 식으로 전투하다가 마침내 함락시킨 다음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죽였다.

-(기리트 성채) 그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학살을 감행했다

-(나흐치반) 그곳을 점령하고 살육과 약탈을 했다.

-(사라우) 살육과 약탈을 한뒤, 아르다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도 했다.

-(바일라칸) 무력으로 점령한 뒤 노소를 불문하고 죽였다.

-(간자) 점령하고 모두 파괴해 버렸다.

<집사> 에서의 그 외에 기록을 보면

어린 아이만 남기고 다 죽이고, 어린애들은 포로로 끌고가 노예로 써먹는 일이라던가,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는 이야기도 수두룩하게 나오고,

심지어 성을 공략할때 포로로 잡은 무슬림 포로들, 

즉 성에 있는 사람들의 지인들을 앞장 세워 방패막이로 써먹으며 전진했고 

그들이 멈추면 뒤에서 창을 찔러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지인들끼리 죽고 죽이게 한뒤 성을 함락되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조리 죽였다.

이슬람의 역사가 이븐 알 아씨르Ibn al-Athir는 당시의 광경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이것이 너무 끔찍해서, 한동안은 쓸 엄두조차 내질 못했고, 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했다.

“몇년 동안 나는 이 재앙에 대해서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질 못했다.

그토록 많은 이슬림교도들의 죽음에 대해 글로 쓰는것이 쉬운 일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는것조차 쉽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신의 전능함으로 아담이 창조된 이후 지금까지 이와 같은 지금까지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없었고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옳은 말을 하는것이다. 

역사에는 이와 유사하고 가까운 내용조차 없다.

(역사학자들이) 언급하는 가장 끔찍한 사건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한 파괴와 학살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두 배가 넘는 크기의 도시들이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 이 저주받을 자들이 한 짓에 비하면 예수살렘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들이 파괴하고 죽인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자식들은 또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우주의 존재와 필멸의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이러한 재앙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아무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 남성, 아이들 죽였다. 

임산부의 배 위를 찢어 갈랐고,

자궁에 있는 아이들을 꺼내 그 배를 찢어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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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에서는 이븐 알 아씨르의 다른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중략)집에 숨어 있을 때 구멍을 통하여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았다. 

몽골인들이 누군가 죽이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무슬림의 기도문을 조롱하여) 

‘라 일라하 일라 알라(알라 외에 신은 없다)’ 라고 외쳤다.

학살이 끝나자 그들은 도시를 약탈하고 여자들을 끌고 갔다. 

나는 그들이 말 위에서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당시 몽골인들은 무슬림 인들을 마치 게임 하듯 죽이면서

무슬림 한명을 죽일때마다 “알라 외에 신은 없다!” 조롱하면서 죽이기도 했다.

大兵驅漢俘及婦女老幼負薪草填壕塹,城上箭鏃四下如雨,頃刻壕爲之平

“몽골군은 한인 포로, 여자들을 몰아서 풀과 흙을 지고 나아가게 하고 참호를 메웠으니,

성 위에서는 화살을 비오듯 쏘았으나, 금세 참호가 메워지게 되었다.”

금사金史/卷113

특히 몽골군이 즐겨 쓰던 방법 중에 하나는

사로잡은 포로 및 일반인들을 앞에 내세워서 서로 죽게 죽이는 하는 방법이었다.

이슬람을 침공할때 써먹은 식으로, 금나라 정벌에서도 사로잡은 일반인 포로들,

특히 전쟁과 연관이 없는 부녀자들을 창칼로 몰아세우며 

흙을 짚고 나아가게 하며 참호를 메꾸는 기록이 <금사> 에서도 언급된다.

성을 지키는 쪽에서는 자기네 동족을 향해 자기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며 화살을 쏘게 된다.

성 밖에서는 울부짖으며 제발 쏘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섶과 짚을 가져와 참호로 다가가다가 동족의 화살에 맞고 쓰러지고,

성 안에서는 제발 오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동족에게 화살을 쏘는것이다.

그야말로 자기네들의 전력은 보존하면서 상대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계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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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투는 수시로 그의 군대를 건장한 병사들로 교체했지만 랴잔 시민들은 외부의 지원 없이 싸워야 했다. 여섯째날 새벽부터 이교도 군사들은 파성추, 성벽을 오르기 위한 수많은 사다리 등으로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그들은 이 신성한 도시하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불태웠고 랴잔 공국의 왕족들, 키예프 공국의 왕자들을 사로잡았다. 신에게 바쳐진 성당들은 파괴되었고 성스러운 제단에서는 수많은 피가 흘려졌다. 도시에는 살아남은 자가 한명도 없었다. 주민 전원이 사망했다………죽은자를 애도할 사람이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들의 자식의 죽음을 애도할수 없었다(아버지, 어머니도 살해당해서).”

러시아에서도 몽골의 학살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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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의 이런 학살에 당한것은 먼나라 이야기 뿐만이 아니다. 

蒙人 漬薪人膏厚積 縱火攻城 灌水救之 其火愈熾 

몽고 군사가 또 나무에 사람 기름을 적시어 두껍게 쌓고 

불을 놓아 성을 공격하므로 물을 부어 그것을 구하려 하였더니, 그 불이 더욱 성하였다.

고려와 몽골의 귀주성 전투 당시, 고려사에 따르면

몽골군은 고려백성을 도륙하고 

그 죽은 고려백성으로 기름을 짜서 불을 지르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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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병이 춘주를 함락할 때 항(恒)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의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은데 모양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묻기를 3백여 인에 이르렀다.” (<고려사> 106, 박항전)

1253년, 몽골군은 춘주성을 포위한다.

겹겹으로 포위당한 성은 우물도 모두 말라버렸고, 양식 따위도 없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피로 목을 축이면서 버텼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절망에 빠져 처자식과 함께 불을 향해 뛰어들어 자살했고, 

성안에 있던 쥐꼬리만한 숫자의 병력들은 어떻게든 포위를 풀어보려 성을 나서 돌파를 시도하다

지휘관 포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섬멸 당했다.

그리고, 무력한 백성들만 남은 빈 성으로 몽골군이 들이닥쳤다.

당시 수도로 떠나 있었던 춘주 출신 박항은 이 소식을 듣고, 

춘주에 남았던 어머니가 걱정되어 부리나케 고향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돌아온 박항의 눈에 보인 것은, 산처럼 쌓인 시체의 언덕 뿐.

무력한 상태에서 몽골군에게 처참하게 도륙당한 고려 백성들’이었던것’ 

너무나도 처참하게 난도질 당하고 훼손 당한 덕분에 형체조차 알아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몽골군은 고려인들을 죽이면서도 그냥 죽인게 아니라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잔학하게 훼손하며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고통을 다 가하고 죽인것이다.

남은 시체들의 상태가 너무나도 처참하여 

박항은 개중에 도저히 어떤것이 자신의 어머니였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고,

“최대한 모양이 닮은” 시신을 300여구 피눈물을 흘리며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게 된다.

합단(哈丹, 카단)의 병사 수만 명이 화주(和州)·등주(登州) 두 주를 함락시킨 뒤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삼았으며 부녀를 잡으면 윤간한 후에 포를 떴다.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보내어 이들을 막았다. ─ 고려사

몽골과 고려의 전쟁이 끝나고 고려가 몽골에 복속된 이후로 이 모든게 끝나나 싶었지만,

수십년뒤 몽골 내부의 내전이 확전되며 ‘카다안’ 이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에 다시 쳐들어오게 된다.

이때 쳐들어온 몽골군은 고려의 지방 도시를 함락한 뒤,

고려인을 죽여서 양식으로 삼았으며,

여자는 단체로 강간을 한뒤 죽여서 포를 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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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잔학함에 대한 기록은 몽골의 ‘일본 원정’ 때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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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은 쓰시마를 칠 무렵 남자는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는데,

특이하게도 여자들은 따로 불러 모은뒤, 일부는 포로로 잡았고

포로로 쓰지 않는 나머지는 손바닥을 뚫고,

피가 철철 흐르는 그대로 뱃전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후 이키섬에서도 같은 짓을 반복했다.

물론 모든 잔혹행위에 대한 기록이 전부 사실은 아닐 수 있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다소 과장시킨 부분도 있을 거싱며,

일부는 몽골에 대한 적대심에서 더욱 부풀린 기록이 있을수도 있으나,

한두곳이 아니라 러시아부터 중동, 중국에서 고려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당대 문명세계의 절반이 넘는 영역에서 

“이렇게 끔찍한 적은 없었다”

“이토록 잔학한 것은 유례가 없었다.” 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고 과장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특히 학살의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학살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거의 여지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출처 : https://www.fmkorea.com/best/438807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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