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엔 냉병기 역시 여전히 중요했고, 총병이라도 검을 지참하고 또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기만 보면 오히려 왜란 전후 조총을 쓰기 시작하면서 검술의 중요성도 더욱 강조됐다
그 성과는 크게 거두지 못했을지언정, 조선 조정은 검술 연마의 중요성은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총 있는데 검술을 뭐하러 배우냐”는 건 후대인의 속편한 소리일 뿐이다
<그림 출처 – 나무위키>
이 같은 시각은 명-조선 연합군이 후금에게 참패한 사르후 전투 9년 뒤인, 1628년(인조 6년) 병조가 올린 소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르후 전투 때도 조선군 중 총병은 3분의 1이었으며 또 다른 3분의 1은 궁수, 나머지 3분의 1은 창검병이었다)

“군졸의 기예로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장기는 궁전(弓箭)이 최고인데, 편전(片箭)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그 묘법(妙法)은 조총(鳥銃)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단 조총을 사용하면서 편전은 전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새것만 좋아하고 옛것은 염증을 낸 나머지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과거를 보일 때마다 특별히 편전에 대한 시험도 보여 따로 상을 주기도 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편전을 익히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시 많은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사자(射者)ㆍ창자(槍者)ㆍ총자(銃者)ㆍ기자(騎者)가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浙江)의 왜병과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진(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조(宣祖)께서는 그런 점을 아셨기 때문에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 및 선전관들 모두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고 그 성적을 고과하여 상과 벌을 내렸으므로 그 당시의 연소한 무인들은 모두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군(諸軍)이 검법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칼을 차고 다니는 자도 적고, 각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월과(月課)할 때에도 조총만 비치해 놓았을 뿐 창이나 칼은 폐지하고 만들지 않으니, 지극히 애석한 일입니다.“

요약하면 ‘조총에 몰빵한다고 활도, 검도 버리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왜냐하면 조선은 활이 가장 큰 특기인데 이를 살리지 못하고 있고
당시 전투는 육박전으로 승부가 났는데, 조선군은 왜군이나 후금군과 달리 검술을 모르므로 크게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럼 선조는 왜 군사들이 검술을 배우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했을까?
왜군에게 야전에서 밀린 원인 중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에는 원조하러 온 명군이나 항왜(조선에 투항한 왜군)를 시켜 군졸에게 검술을 가르치라는 명이 자주 등장한다.
“(명군에게) 반드시 청해야 한다. 검술(劍術)은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 나라에 검술이 전해진다면 좋을 것이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17일)
“우리 나라의 서툰 군사들은 검술을 배워도 쉽게 익히지 못한다. 낙장(駱將)이 의주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때 손수 칼을 잡고 가르쳤다. 반드시 낙장과 같은 사람을 얻어 그 묘술을 배운다면 거의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1593년 1월 7일)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근일에 약간 전습(傳習)하니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이제 한 장수를 정하고 따로 한 부대를 세워 왜인의 창검 쓰는 법을 전습시키고, 그 시재와 논상하는 법은 중국과 동일하게 할 것으로 훈련 도감에 말하라.”(1594년 7월 11일)
“왜인이 투항해 왔으니 후하게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외방으로 보낼 자는 빨리 내려 보내고 그 중에 머물러 둘 만한 자는 서울에 머물러 두고 군직(軍職)을 제수하여 총검(銃劍)을 주조하거나 검술을 가르치거나 염초(焰硝)를 달이게 하라. 참으로 그 묘술을 터득할 수 있다면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다. 왜적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착실히 할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 (1594년 7월 29일)
“대저 서책과 칼은 동일한 것이다. 검술이 상고적부터 있어서 영웅들이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의 무사가 어찌 배우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자주 시험하여 배우는 데 태만히 하는 자는 남방에 충군(充軍)하고, 익힌 것이 월등한 자는 관직을 올려주어 포장(褒奬)하라.” (1594년 9월 2일)

적의 기술이라도 익히면 우리 것이 되니 꺼리지 말고 터득하라는 뜻인데, 생각만큼 순조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답답해서 성을 내는 모습도 보인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중략)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 (1594년 12월 27일)
하지만 모두가 선조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니였다.
누군가 ‘검술은 우리 나라의 장기가 아니니 무익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자 선조는 “어리석은 말“이라고 역정을 내기도 한다

선조의 이러한 노력은 인조를 거쳐 효종 대까지
이어진다. 특히 북벌을 부르짖던 효종은 청군과의 백병전을 염두에 두고 검법 개선에 나선다.

숙종(1682년) 때는 훈련도감 병사 중 하나를 동래 왜관으로 보내 왜검술을 배워오게 하는 일도 있었다

이 병사가 바로 당대 ‘조선제일검’이라고 불리던 김체건이라고 전해진다. 김체건은 한중일 삼국 무예를 통달한 셈이다

본검술(우리 고유 검술)과 왜검술을 포함한 냉병기 기술은
영정조 시대 들어 다시 관심을 받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바로 그 유명한 무사 백동수가 1790년 정조 명을 받들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가 있다.
이후 다시 검술에 대한 관심은 잊혀져 사라지는 듯 했으나

오히려 구한말인 1896년 조정은 다시 검술의 중요성을 주목한다. 왜 였을까.
바로 치안 업무에 필요하다고 보고, 격검(검술)을 경찰 교육 한 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1904년 육군연성학교에서도 교과목에 검술을 포함시켰다.
을사조약 이후인 1908년에는 대한제국과 일본 간 최초로 경찰관 격검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 뭔가 간지나는 짤과 함께 끝 –
P.S.
이왕 항왜 얘기 나온 김에,
선조가 항왜를 이용해 여진족 정벌한
이이제이 글도 곧 쓰겠습니다
출처 : https://www.fmkorea.com/7879114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