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턴 기사단의 성장과 프로이센 공국의 탄생(1525)
종종 16세기 유럽의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지금은 독일의 일부분으로 인식되는 프로이센이 한때는 폴란드의 봉신이었다는 사실을 거의 다 모르고 있죠,
당시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 작고 변방의 공국이 훗날 유럽을 뒤흔드는 강국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요.
시작은 1525년이었어요. 튜턴 기사단의 마지막 기사단장이였던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종교개혁의 흐름을 타고 가톨릭 기사단국을 해체하고, 루터교를 받아들여 ‘프로이센 공국’을 세웠어요.
[1525년경 유럽지도]
하지만 그는 독자적인 군주가 아니었어요. 프로이센은 철저히 폴란드 왕 지그문트1세의 봉신으로 존재해야 했고, 알브레히트는 폴란드의 지그문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공국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정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17세기에 접어들며 프로이센은 점차 자립을 모색했어요. 독일 내에서 입지를 키우고, 신성로마제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세력들과 교류하면서 폴란드의 간섭을 서서히 떨쳐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략이 바로 ‘혼인 동맹’이었어요.
1. 브란데부르크 +프로이센 동군연합의 탄생(1618)
특히 1618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어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이 동군연합 형태로 결합했어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3세의 아들 요한 지기스문트와 폴란드왕국 공주와 결혼한 프로이센공작가문의 공녀랑 결혼을 하게된거죠,(1594)
이 결혼 가계도는 아래 가계도 오른쪽 아래 주황색 박스에 나옵니다.

브란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강력한 영지였고, 프로이센은 제국 밖에 있는 봉신국이었기 때문에, 이 결합은 제국 내외를 아우르는 이중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어요. 이후 프로이센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자 요한 지기스문트의 장인이 사망(1618)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의 작위와 영지는 브란덴부루크 선제후에게 양위가 됩니다.
폴란드의 통제력은 점차 약해졌고, 프로이센은 더 분명한 독립의 길로 나아갔어요. 결정적인 순간은 1657년, 바로 ‘브롬베르크 조약’이었어요. 이 조약에서 폴란드는 마침내 프로이센의 독립을 인정했어요. 종주국이 봉신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중세 봉건 질서가 무너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어요.
이로써 프로이센은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1660년 올리바조약에서 폴란드는 종주권을 포기하게 되고 프로이센은 봉신영주가 종주국을 외교적으로 제압한 사례를 남기게 되고 동유럽에서 중세 봉건질서의 구조적 붕괴를 단초를 제공하는 선례를 남겼어요.
현재와 과거를 기준으로 어떻게 변경되었는지 비교했어요 계속해서 이 지역은 영토가 변하기때문에 잘 비교 해야합니다.

2. 유럽의 중심무대로 하노버 왕조와 프로이센의 결합(외교사적 분석)
1684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해요. 바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3세와 하노버 공녀 샤를로테(조지1세의 누이)의 혼인이었어요. 이 혼인은 단순한 왕실 결합이 아니었어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가문이 서유럽 강국들과의 외교망 속으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유럽 질서 속 입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장치였어요.
아래 가계도에 주황색 박스부분입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그런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어요. 17세기 말부터 이미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 내부 구조는 점점 무너져 내렸어요. 자유 거부권(귀족 만장일치제) 와 귀족의 전횡, 국왕 권한의 약화는 정치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켰고, 농노제 기반의 경제는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가지 못했어요. 상비군도 없던 폴란드는 외세 개입에 속수무책이었어요.
반면 프로이센은 다르게 움직였어요. 1701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즉위했어요.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황제를 지지한 대가를 받은거죠. 제국 내의 브란덴부르크는 여전히 선제후국이지만, 제국 외부의 프로이센에서는 왕이라 칭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지정학적 절묘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가급적 조약 명칭이나 전쟁같이 어려운 파트는 생략–
3. 프리드리히 대왕의 등장과 폴란드의 분할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조지1세가 외조부)이 등장하면서, 프로이센은 진정한 강국으로 도약하게 되었어요. 행정 개혁, 군사 혁신, 상수도 체제 도입을 통해 근대 국가의 틀을 갖췄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어요.
반면 폴란드는 내부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 독립적인 행위자가 아닌 강대국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았어요.
4. 지정학적으로 본 폴란드의 분할
이 시기에 나타난 지정학적 구도도 무척 인상적이에요. 이를 ‘삼각 압박 구조’라고 불러요. 프로이센은 발트해에서 비스툴라 강까지 동서 육상 회랑을 장악했고, 러시아는 서쪽으로 진출하며 동방정교회의 세력 확장을 노렸고, 오스트리아는 북쪽으로 갈리치아 지방을 향해 팽창하려고 했어요.

이 세 국가는 모두 폴란드를 더 이상 ‘완충지대’가 아닌 ‘분할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결국 폴란드는 1772년부터 179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어요.
결국, 이 모든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1525년 프로이센이 봉신으로 출발한 그 순간부터 시작된, 270년에 걸친 지정학적 진화의 결과였어요. 폴란드는 개혁에 실패했고, 내부에서부터 붕괴했으며, 그 틈을 타 프로이센은 봉건제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리고 훗날 독일 제국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어요.
이 역사에서 정치와 외교, 군사와 혼인, 지정학이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돼요. 종주국에서 봉신으로, 봉신에서 강국으로. 폴란드와 프로이센의 역전극은 단순한 세력 이동이 아니라, 유럽 질서의 재편을 상징하는 사건이였죠.